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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우리 민족의 힘으로 능히 해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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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8-04-24 13:57 조회1,94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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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통일씨] 남북연석회의 개최 70년 ② 조정훈 기자 | whoony@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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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측 김구와 북측 김일성이 4월 22일 ‘전조선제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남북연석회의)가 열린 평양 모란봉극장으로 향하고 있다. [사진출처-조선의오늘]

“우리 조선 인민은 우리 문제를 우리 민족의 힘으로 능히 해결할 수 있을 만큼 장성되었다.”

1948년 4월 19일부터 23일까지 평양 모란봉극장에서 ‘전조선제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남북연석회의)가 열렸다. 이어 4월 30일까지 남측 김구, 김규식, 북측 김일성, 김두봉이 함께 모인 ‘남북요인회담’(4김회담)이 진행됐다. 그리고 ‘남북연석회의’ 공동성명이 채택됐다.

70년 전 열린 ‘남북연석회의’의 결과는 무엇인가.

1948년 4월 19일 오후 6시 평양 모란봉극장의 분위기는 장엄했다. 해방 이후 남과 북의 민족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이 정견과 신앙의 차이를 넘어 통일국가 수립의 목표를 지녔기 때문.

하지만 이날 개막식에 남측 김구와 김규식은 없었다. 북행을 결심한 김구는 경교장을 가로막은 군중들로 인해 하루 늦은 20일 평양에 도착했다. 북측에 5개 항의 조건을 제시했던 김규식은 이에 대한 답을 들은 뒤 20일 새벽 5시에 출발해 21일 새벽에 도착했다.

김구.김규식의 개막식 불참으로, 김일성은 이들의 참석을 위해 20일 하루 휴정을 제의하고 21일 이들의 도착과 함께 회의를 속개했다. ‘민주조국의 통일적 독립’을 갈망하는 남북 정당, 사회단체 인사들의 ‘완전한 통일적 민주주의’적인 ‘자주독립국가’를 만드는 역사의 장이 본격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당시에도 김구와 김규식은 연석회의에 탐탁지 않았다. 마치 자신들이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하는 회의에 들러리가 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던 것. 그러나 여기에는 남북 간 오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구와 김규식은 연석회의에서는 실질적인 정치협상 토의가 불가능하기에 4김이 모이는 요인회담이 우선되어야 원만한 결과가 나올 수 있다고 판단한 것. 북측도 소규모지도자회의(요인회담)을 거쳐 연석회의를 개최하자고 제의했다.

그런데, 애초 열리기로 한 14일을 19일로 늦추자는 남측의 제의를 북측은 모든 회의 연기가 아닌 연석회의 연기만으로 받아들였고, 김구와 김규식이 평양에 오지 않아 19일에 당연히 연석회의가 열린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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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일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해 축사를 하는 김구. [사진출처-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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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일 남북연석회의에서 '북조선 정치정세 보고'를 하는 김일성. [사진출처-조선의오늘]

남북의 오해 속에서 김일성과 김두봉이 22일 오전 김구와 김규식의 숙소인 상수리초대소를 예방해 환담한 뒤, ‘연석회의’는 일정대로 진행됐다.

주석단에 선 김구는 “조국분열의 위기를 만구(挽救)하기 위하여 남북의 열렬한 애국자들이 일당에 회집하여 민주자주의 통일독립을 전취할 대계를 상토(商討)하게 된 것은 실로 우리 독립운동사의 위대한 발전”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조국이 없으면 민족이 없고, 민족이 없으면 무슨 당, 무슨 주의, 무슨 단체는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현 단계에 있어서 우리 전 민족의 유일 최대의 과업은 통일독립의 전취인 것입니다.”

‘연석회의’ 마지막 날 23일 ‘남조선 정치정세에 관한 결정서’, ‘남조선 단독선거와 단독정부 수립에 관한 반대투쟁대책’이 채택됐다. 그리고 ‘미.소 양국 정부에 보내는 요청서’가 통과됐고 ‘전조선 동포에게 격함’이라는 격문이 발표됐다. 모든 일정이 끝난 뒤 25일 30여 만 명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평양시 군중대회가 열렸다.

4김, ‘통일민주정부’ 골자 만들다

남북 간 오해로 열리지 않던 ‘요인회담’이 26일부터 30일까지 열렸다. ‘남북조선 정당.사회단체 지도자협의회’의 형식으로 ‘15인회의’, ‘4김회담’ 등에서 구체적인 문제가 다뤄졌다.

‘15인회의’에 남측에서는 김구, 김규식, 조소앙, 조완구, 홍명희, 김붕준, 리극로, 엄항섭, 허헌, 박헌영, 백남운, 북측에서는 김일성, 김두봉, 최용건, 주영하가 참석했다.

그러나 ‘15인회의’의 핵심은 ‘4김회담’이었다. 김구, 김규식, 김일성, 김두봉은 26일 저녁 7시부터 4시간에 걸쳐 협상에 들어갔다. 남측은 김규식이 제의한 5개 항을 중심으로, 북측은 △외국군 철수, △내전 반대, △남한 단독선거.단독정부 수립 반대 등 김일성이 제기한 문제를 놓고 머리를 맞댔다.

30일까지 진행된 협상에서 양측은 △남북통일에 대한 남북지도자의 공동성명, △남북통일을 위한 공동대책기관 구성, △남북 통일운동을 위한 조직문제 등에 합의했다.

그리고 30일 오후 4시 30분경 4김을 포함한 남북요인회담에서 공동성명을 최종.검토한 뒤, 4김이 서명을 했다. 주요 정당.사회단체 공동명의로 이날 오후 9시 공식 발표됐다.

[공동성명서]

남조선 단독 선거에 반대하는 전조선정당사회단체대표 연석회의에 뒤이어 평양에서 4월 30일부터 남북조선정당사회단체지도자들의 협의회가 진행되었다. 이 협의회에서는 상정된 문제를 충분히 토의한 결과 다음과 같이 제문제에 대하여 협의가 성립되었다.

1. 소련이 제의한 바와 같이 우리 강토에서 외국 군대가 즉시 철거하는 것은 우리 조국에서 조성된 곤란한 상태하에서 조선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정당하고 유일한 방법이다. 미국은 이 정당한 제의를 수락하고 자기 군대를 남조선에서 철퇴시킴으로써 조선독립을 실제로 원조하지않으면 안된다. 일제가 우리 조국에서 구축된 이후 우리 조선인민은 자력으로 외국의 간섭없이 우리 문제를 우리 민족의 힘으로 능히 해결할 수 있을 만큼 장성되었으며, 우리 조국에는 이것을 해결하기에 충분한 간부들이 다수 있다.

2. 남북 정당 사회단체 지도자들은 우리 강토에서 외국 군대가 철퇴한 후에 내전이 발생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며, 또 그들은 통일에 대한 조선 인민의 지망에 배치하는 여하한 무질서의 발생도 용허하지않을 것이다. 남북 정당 사회단체들간의 전취 약속은 우리 조국의 완전한 질서를 확보하는 튼튼한 담보이다.

3. 외국 군대가 철퇴한 이후 하기 제정당, 단체들은 공동명의로써 전조선정치회의를 소집하여 조선 인민의 각 일체 책임을 갖게 될 것이다. 이 정부는 그 첫 과업으로 일반적, 직접적, 평등적, 비밀 투표로써 통일적 조선 입법기관을 선거할 것이며, 선거된 입법 기관은 조선 헌법을 제정하여 통일적 민주 정부를 수립하여야 할 것이다.

4. 상기 사실에 의거하여 본 성명서에 서명한 제정당, 사회단체들은 남조선 단독선거의 결과를 결코 인정하지 않으며 지지하지 않을 것이다.

1948년 4월 30일

북조선노동당, 남조선노동당, 북조선민주당, 한국독립당, 민족자주연맹, 북조선청우당, 조선인민공화당, 북조선직업동맹, 북조선농업동맹, 근로인민당, 북조선민주청년동맹, 신진당, 사회민주당, 북조선민주여성동맹, 남조선청우당, 근로대중당, 민주한독당,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조선농민당, 민족동맹,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북조선공업기술연맹, 조선전국농민연맹, 조선민주애국청년동맹, 조선민주여성동맹, 조선문화단체총연맹, 북조선기독교연맹, 기독교민주동맹, 전국유교연맹, 조선어연구회, 북조선수산기술총연맹, 전국불교도총연맹, 불교청년당, 북조선불교연합회, 자주여성동맹, 북조선보건연맹, 민주학생총동맹, 북조선적십자사, 재일조선인연맹지부, 북조선애국투사후원회, 천도교학생회, 혁신복음당, 삼일동지회, 민족대동회, 민중구락부, 건국청년회, 반팟쇼공동투쟁위원회, 건민회, 민족문제연구소, 삼균주의청년동맹, 독립운동자동맹, 학병거부자동맹, 민족해방청년동맹, 청년애지회, 남조선신문기자단, 민족해방동맹

공동성명은 통일 민족국가 수립의 대원칙이 담겨있었다. 서중석 성균관대 명예교수는 “1항의 외국철수도 개항 이래 요구되었던 원칙과 연결된 것으로 풀이할 수 있고, 또 그것은 2항과 직결되어 있다”고 평가했다.

그리고 “민족문제는 결코 전쟁에 의존해서는 안 되고 평화적 방법에 따라 곧 대화와 타협에 의하여 해결되어야 하”며 “3항에서는 민족국가 수립의 구체적 방안이 제시되었”고 “4항에서의 남한 단선반대는 북의 단선도 반대하는 것으로 해석된다”고 분석했다.

북한은 “조국의 통일독립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하게 정당한 길을 밝힌 강령적 문건”이라고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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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북연석회의가 열린 평양 모란봉극장에 대표자들이 입장하는 모습. [사진출처-조선의오늘]

‘남북연석회의’에 이어 ‘요인회담’이 성과적으로 끝났다. 5월 1일 참가자들은 빗속에서 메이데이 군중대회에 참가했다. 만경대학명학원, 김일성대학 건축장, 황해제철소, 강선제강소, 만경대, 최승희무용연구소, 평양방직공장 등을 불러봤다.

5월 3일 김구와 김일성은 1시간 30분 동안 회담을 했다. 여기서 김구는 한독당 당원의 석방문제와 함께 자신의 장래에 관해 “만일 미국인들이 나를 탄압한다면, 북한에서 나에게 정치적 피난처를 제공할 수 있는가”라고 물었고, 김일성은 긍정적으로 답했다고 한다.

이어 4일 북한이 강조하는 이른바 ‘쑥섬협의회’가 열렸다. 작별모임 형식이던 이날 김구, 김규식, 김일성, 김두봉과 홍명희는 대동강 쑥섬으로 갔다. ‘15인회의’ 참가 대표자들도 함께했다.

참가자들은 평양의 역사유적 이야기, 평양 나들이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하지만 공동성명이 갖는 의미를 재확인하는 자리였다. 또한, 김구와 김규식이 거듭 제기한 송전.송수 문제, 조만식의 월남, 안중근 유해봉환 등의 주제가 빠지지 않았다.

이곳을 두고 북한은 “김일성 동지께서 남조선의 김구와 그 밖의 여러 민주인사들과 친히 자리를 같이하고 그들에게 은혜로운 사랑을 베풀어주시면서 사업한 뜻깊은 곳”이라며 의의를 두고 있다. 그리고 현재 쑥섬은 ‘남북연석회의기념사적지’로 과학기술전당이 조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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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0년 전 '쑥섬협의회'가 열린 평양 대동강 쑥섬. 현재 ‘남북연석회의기념사적지’로 과학기술전당이 조성됐다. [사진출처-조선의오늘]

‘남북연석회의’ 이후 홍명희, 리극로, 백남운, 최동오, 장권, 정진석 등은 평양에 남았다. 38선을 넘으면 북한에 억류될 것이라는 군중의 우려가 가시게, 김구와 김규식은 5월 5일 서울에 도착했다.

“남북 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는 조국의 위기를 극복하며 민족의 생존을 위하여는, 우리 민족도 세계의 어느 우수한 민족과 같이 주의와 당파를 초월하여서 단결할 수 있다는 것을 또 한 번 이런 행동으로써 증명한 것이다...(중략)...자주적.민주적 통일조국을 건설할 방향을 명시하였으며, 외력의 간섭만 없으면 우리도 평화로운 국가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을 확증하였다.”

‘남북연석회의’에서 ‘통일민주정부’수립의 골자를 만든 김구는 한 번에 만족하지 않고 두 세 차례 남북협상이 필요하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희망했다.

하지만 1948년 5월 10일 이승만과 미국이 밀어붙여 남한 만의 단독선거가 치러졌다. 그리고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다. 북한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김구는 1949월 6월 총탄으로 쓰러졌다. 김규식은 한국전쟁 중 북으로 갔다.

‘남북연석회의’로 북한 정권수립의 민족성.통일성에 대한 정당성과 합법성을 부여하는 기초를 제공했고, 한반도 문제의 국제화 속에서 민족 염원만이 해결의 능사가 아니며, 남측의 인사들은 민간일 뿐 정부를 대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원래 한계가 있었다는 지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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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양 을밀대 앞에서 선우진, 김규식, 김구, 원세훈. [사진출처-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회]

그러나 남북이 전쟁없이 통일을 위해 대화와 협상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점을 대내외적으로 알린 계기였다.

특히, ‘공동성명’은 남북 통일정부가 나갈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외세의 간섭없이 민주적인 통일국가를 수립하기 위해, ‘전조선정치회의’ 구성을 통한 ‘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이 필요하다는 현실적인 고민도 담겼다.

이는 6.15선언과 10.4선언에서 확인된 ‘민족 대단결을 통한 민족문제 해결’과 일맥상통한다. 그리고 오는 27일 판문점에서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이 열린다. 70년째 이어진 통일을 위한 남북 지도자의 논의 성과가 기대된다.

70년 전 김구와 김규식은 이렇게 말했다.

“첫술에 배부를 수 없는 것이니 우리가 이것으로써 만족을 느낄 수는 없는 것이다. 이미 거두어진 성과를 가지고 최후의 성공을 하는 것은 오직 우리의 애국동포 전체가 일치하게 노력하는 데 있을 뿐이다. 우리는 행동으로써만 우리 민족은 단결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 아니라, 사실로도 우리 민족끼리는 무슨 문제든지 협의할 수 있다는 것을 체험으로 증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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